생명과학

인간의 뇌 속에 있는 GPS -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

memo01004 2025. 8. 16. 15:09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 – 뇌 속에 존재하는 GPS 시스템의 비밀

서론: 뇌 속의 내비게이션, ‘내부 GPS’를 탐사하다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뇌가 공간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위치 지우는 메커니즘, 즉 내부 GPS 시스템을 발견한 세 명의 연구자에게 수여되었다. 수상자는 영국 출신의 존 오키프(John O’Keefe)와 노르웨이 과학기술대학교의 부부 과학자인 마이-브리트 모세르(May-Britt Moser), 에드바르드 모세르(Edvard I. Moser)이다.

이들은 “우리는 어떻게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대한 뇌의 해법을 밝혀냈고, 이는 인류의 기억과 공간 인식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설계한 발견으로 평가된다.


존 오키프: 해마의 '장소 세포' 발견

1971년, 존 오키프는 실험용 쥐의 해마(hippocampus)에서 특정 장소에 있을 때만 활성화되는 뉴런을 발견하고 이를 ‘장소 세포(place cell)’라 명명했다. 각 장소 세포는 마치 지도 위의 한 점을 표시하듯, 특정한 위치에서만 반응하는 특성을 지녔다. 이러한 장소 세포들이 집합적으로 작동하면, 뇌 속에 공간의 형태와 환경적 단서가 기록된 ‘정신 지도(cognitive map)’가 형성된다.

이 발견은 당시 뇌 연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공간 기억과 위치 인식을 이해하는 핵심 토대가 되었다.


모세르 부부: ‘격자 세포’라는 좌표 체계 구축

2005년, 마이-브리트와 에드바르드 모세르 부부는 해마와 연결된 내측 후각피질(medial entorhinal cortex)에서 규칙적인 육각형 패턴으로 활성화되는 ‘격자 세포(grid cell)’를 발견했다. 격자 세포는 마치 좌표망처럼 공간을 일정한 간격의 격자로 나누어 위치 정보를 부여하며, 장소 세포가 기록하는 ‘특정 지점’ 정보를 보다 정밀한 거리·방향 데이터와 결합한다.

이 좌표망은 동물이 움직이는 경로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갱신되며, 거리와 방향 정보를 기반으로 현재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한다.


GPS in the brain

과학적 원리 확장

이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뇌 속 GPS는 여러 층위의 신경 회로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작동한다.

  1. 위치 감지와 환경 단서 처리
    동물이 특정 장소에 도달하면, 해마의 장소 세포가 활성화되어 그 지점을 ‘위치 정보’로 태그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각,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 정보가 통합되어 환경의 특징이 함께 저장된다. 예를 들어, 쥐가 먹이를 찾는 미로의 한 구역에 있을 때, 주변 벽 색상이나 냄새 같은 단서가 장소 세포의 활성 패턴에 포함된다.
  2. 좌표 기반 경로 계산
    격자 세포는 일정한 간격의 육각형 격자를 형성하며, 동물이 이동하는 동안 연속적으로 활성화 패턴을 변화시킨다. 이 격자 패턴은 동물이 이동한 거리와 방향을 계산하는 ‘경로 적분(path integration)’ 메커니즘의 핵심이다. 즉, GPS 위성 신호 없이도 자신의 이동 궤적을 계산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이다.
  3. 방향과 경계 정보 통합
    내측 후각피질과 해마에는 방향 세포(head direction cell)와 경계 세포(border cell)도 존재한다. 방향 세포는 머리의 방향을, 경계 세포는 물리적 장벽이나 환경의 경계를 감지한다.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는 이 정보들과 결합하여 더욱 정확한 공간 지도를 완성한다.
  4. 기억 형성과 장기 저장
    이렇게 완성된 공간 지도는 해마에서 단기적으로 사용되다가, 필요에 따라 대뇌 피질의 관련 부위에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이를 통해 이전에 가본 장소를 다시 방문하거나, 새로운 경로를 계획할 때 활용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놀랍게도 유연하게 작동한다. 환경이 변하더라도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는 새로운 패턴을 형성하여 업데이트하며, 이는 마치 내비게이션 지도가 최신 정보로 자동 갱신되는 것과 같다.


의학적·사회적 파급효과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의 발견은 단순히 뇌 과학 분야의 학문적 성취를 넘어, 의학, 심리학, 공학,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신경 퇴행성 질환의 조기 진단 및 치료 전략 개발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알츠하이머병, 치매, 해마 손상 환자들은 종종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잘 알던 길에서도 길을 잃는 증상을 보인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해마와 내측 후각피질의 손상으로 인해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의 기능이 약화된 결과임을 밝혀냈다. 이를 기반으로, 공간 인식 능력 저하를 조기에 평가하는 진단 도구가 개발되고 있으며, MRI나 기능적 뇌 영상(fMRI)을 활용해 공간 탐색 과제 중 뇌 활동 패턴을 분석하는 방식이 연구 중이다.

 

둘째, 인지 재활 및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 훈련 프로그램 개발에도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VR) 환경에서 환자가 안전하게 ‘가상 탐험’을 하며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를 활성화하도록 설계한 치료법이 시도되고 있다. 이는 뇌의 경로 탐색 회로를 자극해 기능 회복을 돕는 동시에, 실제 환경에서 길 찾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정신 건강 분야에서도 이 연구의 응용 가능성이 크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들은 특정 장소나 환경과 연관된 부정적 기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는 해마에서 형성된 공간 기억과 관련이 있다.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면, 이런 기억을 안전하게 재구성하거나 완화하는 치료 기법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넷째, 로봇공학과 인공지능(AI) 내비게이션 시스템에도 혁신을 제공하고 있다. 기존의 GPS 시스템은 위성 신호를 필요로 하지만, 실내나 지하 공간에서는 작동이 어렵다. 반면, 장소 세포와 격자 세포의 원리를 모방하면, 환경의 시각적·물리적 단서를 활용하여 스스로 위치를 파악하고 이동 경로를 계획하는 ‘뇌 유사 내비게이션’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로봇 연구 그룹은 해마 기반의 경로 계획 시스템을 도입해, 복잡한 미로 환경에서 로봇이 인간 수준의 경로 탐색 능력을 보여주도록 성공했다.

 

다섯째, 교육과 훈련 분야에서도 이 발견은 의미 있는 변화를 주고 있다. 조종사, 항해사, 구조대원 등 복잡한 환경에서 공간 인식 능력이 중요한 직군을 대상으로, 뇌의 위치 인식 회로를 강화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설계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뇌의 특정 회로를 목표로 한 과학적 훈련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인식 변화도 일으켰다. 과거에는 길을 잘 찾는 능력이 단순한 ‘감각’이나 ‘경험’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뇌 속의 정교한 GPS 시스템이 개입하는 과학적 현상임이 널리 알려졌다. 이는 공간 인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련 질환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 뇌의 내비게이터를 찾아내다

존 오키프와 마이-브리트, 에드바르드 모세르는 뇌 속에 숨겨진 GPS의 존재와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이들의 발견은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환경을 인식하고, 위치를 파악하며, 기억을 활용해 이동하는지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앞으로도 이 연구는 뇌 질환 치료와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시스템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