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두 바이러스의 비밀을 풀다-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

memo01004 2025. 8. 10. 16:16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 – 두 바이러스의 비밀을 풀다

인류를 위협한 두 질병의 원인을 밝히다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전 세계적인 보건 위기를 일으킨 두 가지 바이러스의 실체를 규명한 세 명의 과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절반의 상은 하랄트 추어 하우젠(Harald zur Hausen)에게 돌아갔다. 그는 자궁경부암의 원인이 되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를 발견해 예방과 치료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나머지 절반은 프랑수아즈 바레-시누시(Françoise Barré-Sinoussi)와 뤽 몽타니에(Luc Montagnier)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 중 하나인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들의 연구는 감염병 연구와 암 예방 의학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하랄트 추어 하우젠 – HPV와 자궁경부암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1970~80년대 초반, 의학계에서는 자궁경부암의 원인이 헤르페스 심플렉스 바이러스(HSV) 일 것이라는 가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독일 바이러스학자 하우젠은 기존 이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HPV가 자궁경부암의 주범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장기간의 연구에 착수했다.

하우젠은 HPV-DNA가 종양 내에서 ‘비생산적(non-productive)’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바이러스가 숙주 유전자에 통합되어 암 발생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그는 HPV-DNA를 검출할 수 있는 분자생물학적 기법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암 조직에서 HPV16과 HPV18 유형을 최초로 분리·동정했다.

그는 HPV가 단일 바이러스가 아니라 다양한 계열을 가진 바이러스 집단임을 밝혀냈으며, 이 중 일부 유형만이 발암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러한 연구는 HPV 감염의 자연사와 발암 메커니즘 이해에 크게 기여했고, 나아가 HPV 백신 개발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HPV 백신의 임상 개발과 글로벌 보급

하우젠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 전 세계 제약사와 연구기관들은 발암성 HPV 유형을 표적으로 한 백신 개발에 돌입했다. 초기에는 바이러스 유사 입자(VLP, Virus-Like Particle) 기술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실제 바이러스의 단백질 껍질만을 모방해 면역 반응을 유도하고, 감염 위험은 전혀 없는 방식이었다.

2006년, 세계 최초의 HPV 백신이 미국과 유럽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후 2007년에는 2가, 4가, 9가 백신이 차례로 개발되며, 예방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임상시험에서 백신 접종자는 고위험 HPV 감염률과 전암 병변 발생률이 대조군에 비해 현저히 낮았으며, 이 결과는 여러 국가의 국가예방접종사업(NIP)에 백신을 포함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호주, 영국, 캐나다 등은 청소년기 여학생을 중심으로 HPV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고, 일부 국가는 남학생까지 접종 대상을 확대했다. 접종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10년 이내에 HPV 감염률이 급감하고, 자궁경부 전암 병변이 최대 90% 감소하는 성과가 보고되었다.


프랑수아즈 바레-시누시와 뤽 몽타니에 – HIV의 정체를 밝히다

1980년대 초반, 전 세계적으로 정체불명의 질병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건강하던 사람들이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각종 감염과 암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현상이 보고되었고, 이는 곧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바레-시누시와 몽타니에 연구팀은 이 질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환자의 림프절 조직과 혈액을 분석했다. 그 결과, 역전사 효소(reverse transcriptase)를 보유한 새로운 형태의 레트로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이는 이후 HIV로 명명되었으며, 인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병원체로 밝혀졌다.

그들은 초기 림프절이 커진 환자의 림프구와 말기 환자의 혈액에서 바이러스 생산을 확인했고, 형태학적·생화학적·면역학적 특성을 분석해 HIV를 최초의 인간 렌티바이러스(human lentivirus)로 규정했다. 이 바이러스는 림프구에 대규모 복제를 일으키며, 면역세포를 파괴해 인체의 방어 체계를 붕괴시켰다.


HIV & HPV
HIV & HPV

HIV 발견 이후의 국제 협력과 치료 혁신

HIV가 발견되자, 전 세계 보건 당국은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전례 없는 국제 협력에 나섰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에이즈(UNAIDS)는 HIV 감염 경로 차단, 조기 진단 확대, 치료 접근성 향상을 목표로 한 글로벌 HIV/AIDS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ART)가 개발되면서 HIV 치료에 혁신이 일어났다. 초기 단일 약제 요법은 내성 문제가 있었지만, 세 가지 이상의 약제를 병용하는 칵테일 요법(HAART)이 도입되면서 HIV는 더 이상 즉각적인 사망선고가 아닌, 장기간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제 기금과 제약사의 특허 완화 협정이 추진되었다. 이 덕분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저소득 국가에서도 저가 제네릭 약품을 이용한 치료가 가능해졌다.


인류 보건에 남긴 유산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은 단순히 병원체 발견에 그치지 않았다. HPV 백신은 여성의 삶의 질과 생존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고, HIV 발견과 치료제 개발은 감염병 대응의 새로운 표준을 세웠다. 오늘날 이 두 질병은 과거만큼 치명적이지 않지만, 여전히 전 세계적인 경각심을 요구하는 보건 과제다.

이들의 발견은 과학이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고, 감염병 연구와 암 예방이라는 두 축에서 인류 건강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다. 앞으로도 HPV와 HIV 연구에서 비롯된 교훈은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과 암 예방 전략 수립에 귀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