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 생리의학상 – 마이크로 RNA 발견의 선구자들
서론: 작은 RNA가 생명을 바꾸다
2024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빅터 앰브로스(Victor Ambros)와 게리 루브쿤(Gary Ruvkun)에게 공동 수여되었다. 그들은 단백질을 만들지 않지만 유전자 발현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마이크로 RNA(microRNA)의 존재와 작동 방식을 밝힘으로써, 생명과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업적은 단순히 작은 RNA 조각을 발견한 것을 넘어, 세포가 환경에 따라 어떤 단백질을 발현할지를 미세하게 통제하는 “숨은 유전자 스위치”를 찾아낸 사건이었다.
수상자와 업적
빅터 앰브로스: 최초의 마이크로RNA, lin-4의 발견
빅터 앰브로스는 예쁜꼬마선충 C. elegans를 연구하던 중 발달 단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돌연변이를 관찰했다. 원인을 추적하던 그는 lin-4라는 유전자가 단백질을 암호화하지 않고, 단지 22개 염기로 이루어진 작은 RNA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만 해도 “RNA는 단백질 합성을 위한 메신저”라는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기에, 이 발견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lin-4 RNA는 다른 유전자(mRNA)의 3′-UTR에 결합하여 단백질 번역을 억제했다. 이는 세포 내에서 단백질 생성량을 제어하는 완전히 새로운 조절 메커니즘을 제시한 첫 사례였다.
빅터 앰브로스 교수는 노벨상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MIT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데이비드 볼티모어 (David Baltimore)로 197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이고, MIT 박사 후 과정(포닥과정) 지도교수가 로버트 호비츠 (Robert Horvitz)로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되었던 200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이다. 사제지간의 노벨상 수상은 이미 여러 case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지만, 여기서 하나 더 신기한 건 하버드 대학 교수시절 제자인 크레이그 멜로 (Craig Mello)가 먼저 200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지도교수도 받고 제자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못 받았던 한을 이제야 푼 케이스이다. 빅터 앰브로스 교수나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학계 3대에 걸친 노벨상 수상 계보를 잇게 되었다.
게리 루브쿤: 보존된 microRNA, let-7의 발견
게리 루브쿤은 이어서 또 다른 microRNA인 let-7을 발견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유전자가 C. elegans에만 국한되지 않고 초파리, 생쥐,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에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microRNA는 단순한 특수 현상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보존된 보편적 조절 체계였다.
루브쿤은 let-7이 발달 과정에서 시기와 순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이는 유전자 발현 조절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과학적 원리: 세포 속 미세한 조율 장치
세포 내 유전 통제의 숨은 조정자
전통적인 유전자 발현 조절은 DNA에 결합하는 전사인자들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앰브로스와 루브쿤은 전사 후 조절(post-transcriptional regulation)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주목했다.
- 앰브로스 연구실은 예쁜꼬마선충 C. elegans에서 lin-4라는 유전자를 클로닝했더니, 단백질을 코딩하는 게 아닌 22개 염기로 이루어진 작은 비암호화 RNA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기존의 상식에 완전히 반하는 발견이었다.
- 루브쿤 연구팀은 lin-4 RNA가 lin-14라는 다른 유전자의 3′ 비번역영역(3′-UTR)에 결합하여 단백질 생성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즉, 마이크로RNA가 mRNA를 인식해 발현을 조절하는 새로운 기전을 밝힌 것이었다.
보존되고 확장된 유전자 조절 체계
7년 뒤, 루브쿤은 let-7이라는 또 다른 microRNA를 찾아냈고,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이 let-7은 C. elegans뿐 아니라 초파리, 인간까지 진화적으로 보존된 유전자였던 것이다. 즉 microRNA는 단세포를 넘어 복잡한 다세포 생물에서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유전 제어 수단이었음을 증명했다. 이후 수천 개의 microRNA가 다양한 생물에서 발견되었고, 유전체에 걸쳐 거대한 조절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세포별 특이적 유전자 발현의 숨은 조율
microRNA 시스템은 다시 말해, “세포마다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microRNA가 그 발현을 조절함으로써 세포 종류에 따른 차별적 단백질 표현이 가능하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또한 암, 선천성 이상, 면역 질환 등 다양한 질환에서 microRNA의 이상 발현이 핵심 역할을 함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의학적·사회적 의의
- 질병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 microRNA 이상 발현은 암세포의 성장, 전이, 약물 저항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새로운 진단 도구: 혈액이나 소변 속 microRNA 패턴은 질병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로 활용되고 있다.
-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 특정 microRNA를 억제하거나 보충하는 방식으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치료제가 연구 중이다.
- 기초 연구와 응용의 가교: 앰브로스와 루브쿤의 업적은 순수 기초 생물학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정밀의학과 유전자 치료의 토대가 되고 있다.
결론: 작은 RNA, 거대한 발견
빅터 앰브로스와 게리 루브쿤은 단지 새로운 유전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신을 조율하는 두 번째 언어를 발견했다. microRNA 연구는 이제 생명과학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으며, 의학·생명공학의 미래를 이끄는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2024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작은 RNA 조각이 어떻게 세포의 운명과 인간의 건강을 바꾸는지를 보여준 위대한 업적에 대한 찬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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